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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6-04 14:08
[집회말씀] 성령의축제(첫째날 -안민교수편-)
 글쓴이 : 강창술
조회 : 3,046  
   성령축제(안민).hwp (45.5K) [9] DATE : 2009-06-04 16:04:10
  

성령의 축제(첫째날)


일시 : 2009. 6.3(첫째날)

강사 : 안민(고신대 부총장)

장소 : 드림교회

정리 : 강창술집사


1. 들어가는말

저는 드림교회 목사님을 만나서 좋은 음식을 대접받아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대구에도 합동측 교단에도 이런교회가 있는가 의심할정도로 행복한교회 하나님의 꿈을 이루워가는교회 너무나 귀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저의 아내 은사님으로 계신 김승호장로님이 섬기시는 교회와서 함께 찬양을 하고 이렇게 강의를 할 수가 있어서 너무나 좋습니다.


드림교회가 얼마나 좋은지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찬양이 살아 있고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 목사님과 대화 가운데 정말 휼륭한 목사님을 모시는 교회 여러분은 너무나 행복한 교인입니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찬양에 대한 자유로운 교회 살아있음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제가 강의를 안 해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왔으니 조금만 강의하고 돌아가겠습니다.


2. 본 문

저는 고신대에서 28년째 섬기고 있습니다. 제 인생이 50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음악하면서 제자를 키우고 그러다보니 50중반을 넘겼습니다. 제 어릴 때 꿈은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가난에 지친 저의 가정은 제가 휼륭한 의사이거나 아니면 법관 아니면 상대를 나와 가난에 지친 가정을 세우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 가난한시절 부모의 자식에 대한 기대는 출세해서 편안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내게 그런 기대를 거셨습니다. 의사가 되어 돈도 벌고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나 역시 아버지의 그런 기대에 부응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내가 너무 노래를 잘 불렀다는 것입니다. 내가 음악계에 데뷔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교회 여름성경학교 때 개최한 독창대회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것이 첫 데뷔였습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결국 나는 교회 행사 때마다 교회 어른들 앞에 불러 나가서 독무대로 주름을 잡았습니다.


 아이들 사이에서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 어른 찬양대가 찬양을 하면서 고음을 내는 어린 목소리의 솔리스트가 필요할 때면 나를 부르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거룩한 성'을 부르려고 할 때 어린이 솔리스트로 초빙을 받았습니다. 어른들이 인정할 만큼 나는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음악으로 대성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중학생 때는 어린이 주일학교 찬양대 지휘자로, 고등학생 때는 중고등부 찬양대를 지휘했습니다. 그러니 이래저래 지휘를 한 경력으로 따지면 40년에 가깝습니다. 따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천부적인 은사가 나를 음악의 세계에 머물게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서원을 따라 의사가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 가운데 있었습니다. 더구나 남자가 음악을 한다는 것은 '딴따라'라는 터부시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환영받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노래에 나가면 항상 1등 그래서 내가 음대를 간다면 음대 지망생들이 나를 싫어했습니다. 제는 의대나 법대가지 왜 나의 경쟁자가 되는거야?


저는 경남고를 나왔습니다. 어느날 나는  앞으로 10년 후에는 어떻게 살아갈까?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어느 날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일이 생겼습니다. 의사가 될 생각을 한 나는 당연히 이과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선택을 할 때가 되자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10, 20년 후에 내가 의사 가운을 입고 환자를 수술하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이건 아니야'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안에 숨겨있던 다른 욕망, 즉 '내가 평생 노래만 하고 살 수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하고 지휘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전까지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 내 안에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사가 되면 매일 내 생활이 환자와 살게 되고 무엇인가 답답하게 한쪽마음에 아파 왔습니다. 의사가 되면 돈은 많이 벌지 모르지만 내 평생에 행복으로 다가 올까? 의사로서 평생에 살수가 있을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문이과 반을 나눌 때가 됐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 미칠것만 같았습니다.


노래하고 싶은 속마음을 발견한 나는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기 전에 내가 재능이 있는지 정확하게 테스트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악가 한 분을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내가 처음 보는 악보를 꺼내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테스트를 받고 합격점을 얻었습니다. "우아, 안민이니 목소리 죽이네! 노래 잘한다. 니는 타고난 목소리가 좋고, 음악성이 뛰어나고, 악보 보는 실력도 뛰어나니, 나한테 레슨만 열심히 받으면 니가 원하는 대학은 어디든 갈 수 있겠다." 성악 선생은 노래를 가르쳐 달라는 내게 어머니를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레슨비문제였습니다. 자네 어머니와 레슨이야기를 해야 한다며 한달에 40,000원 였습니다. 당시 대학에 첫 등록금 10만원일때 였는데  제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우리집에서 가능할까?  레슨비를 감당 할 수가 있을까? 부모님이 허락할까?  


저는 고등학교시절 경남고가 산중턱에 있는데 땀범벅이 될 정도로 뛰어가며 또한 점심도시락에는 쌀 한토막없이 보리쌀 넙죽쌀로 된 밥을 먹고 지낼정도로 가난에 찌들린 집에서 자랐습니다. 우리집은 딸셋 아들하나 저는 2대 독자였는데 이런 가정에서 제가 음악을 한다고 하면 아버지가 들어 주실까?  용기를 내어 어느날 저녁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레슨비가 40,000원입니다. 아버지 제가 노래할수있도록 해주세요 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나를 박살을 내었습니다. 다음날 아버지에게  또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박살낫습니다. 어머니 포기하려고 수없이 했지만 포기가 안되요 어머니 제가 노래하게 해주세요 . 우리 어머니는 매일 일을 하면서 집안을 도왔습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엄마 내 노래 안 시켜주면 팍 죽어버린다. 어머니께서는 민아! 음악 뒷바라지를 못해준다.  마음잡고 공부해라. 어머니의 애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내고 집을 나갔습니다. 저는 3일째 밤잠을 못자고 괴로워 했습니다. 우리집은 방세개 그중 방 2칸 전세주고 방한칸에 6명이 한방에 사는 곳에 저는 생활했습니다. 어머니가 나의 이러한 행동에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서 나를 흔들어 깨워 엄마가 어떻게 하면되는냐? 민아 노래해라 내가 도와줄게! 어머니 쌤이 말씀을하면 그냥 예 예 하면 됩니다. 어머니의 심정은 이러다가 2대독자를 잃을지 모른다는 다급함에 음악선생을 찾게 되고  레슨비 돈 40,000원을 감당하기위해 어머니는 밤에도 봉투접고 아버지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경비를 하여서 제 레슨비를 감당했습니다. 우리어머니는 협박하면 안되는구나 야근하고 돌아오시며 돈이 되면 닥치는 대로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비밀 아버지는 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문과 출신이라 노동판에 가서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레슨비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는 밤에는 경비를 하였습니다.


 그해 나는 서울음대 성악과에 원서를 내었습니다. 우리선배가 신학 하는곳에 2시간 뛰어 가면서 시험치고 나왔습니다. 우리아버지가 어느새 내가 알아보니까 합격이 어러운 것 같으니 이번에 떨어지면 재수를 해서 의과대학가라. 힘이 빠졌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발표전날 나는 무조건 상경했습니다. 교정에 합격자명단이 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외자가 안보입니다. 그래서 밑에서 위로보니 외자가 보이는데 “ 안민” 너무나 기뻐고 좋아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공중전화로 합격이라고 말해도 어머니는 민아! 동명이인가 잘 바라 어머니는 울기만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를 향하여 찬양 할 수가 있다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하나님이 세워주셔서 이런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수가 없는데 나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내가 믿음, 기도 가 좋아서 그것도 아닙니다. 여기까지 올수가 있는 것은 첫 번째 당신들의 송두리째 인생을 포기하시고 아들을 위해 헌신해주신  좋은 어머니 아버지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좋은 어머니 우리 부모님이 있어서 저 안민이가 존재했습니다.  입학식이 다가 왔습니다. 2월말 차가운 대합실에서 기도한번 해보자 제 손을 꼭 붙잡고 기도하시는 아버지 한번도 가보지 못 한 서울로 갑니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느낍니다.  아버지눈물로 기도하는데 자식인 저는 설레임입니다 . 자식을 떠나 보내야하는 눈물을 흘리는데 아들인 저는 서울을 동경하며 빨리 기도가 끝이 나기를 기다립니다. 참 안타깝지요 그래도 기차출발 3분 남겨두고 아버지의 기도는 끝이났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그때가 이생에 마지막 이별인줄 몰랐습니다. 나를 서울대 보내 놓고 온 식구가 나의 학비를 벌기위해 산업전선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누나는 부산여중 1등을 할 정도로 수재중에 수재인데 남동생 때문에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비를 버는데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24시간 일을 하다가 서러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19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과외금지 조치가 내려지기 전까지 과외를 통해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여의도에서 가정교사로 지낼 때 일입니다. 예수를 믿던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온 가족들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주일에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수요일, 금요일에도 나갈 만큼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주인 되시는 아주머니께서 내게 난처한 질문을 했습니다.

 "안 선생, 교회는 새벽기도회를 며칠에 한 번씩 하는 거야?"

 "그런 거는 입장 곤란하게 왜 물어보세요? 제가 잘 가지도 못하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내 말을 잡아서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습니다.

 "안 선생이 우리 집에 오고 나서 가끔 새벽에 사라지기에 내가 어디 가는 건가 보니까 교회를 가더라고."

 그 말에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나가기는 하지만 바쁜 날 때문에 날마다 새벽기도를 나가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힘이 닿는 대로 불규칙적인 새벽기도를 했는데 그것을 아주머니가 본 것입니다. 초신자인 아주머니가 보기에 새벽기도회는 언제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새벽기도회는 날마다 있습니다. 제가 피곤해서 날마다 못 가서 그렇지, 그런데 왜 그러세요?"  "내가 내일부터 새벽기도를 한 번 가보고 싶은데 혼자 가려니 좀 그러네, 안 선생이 나하고 좀 같이 갈 수 있겠나?"

 아주머니는 새벽기도가 힘든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러자고 했습니다. 잘해야 일주일 정도면 그만 두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나갔습니다. 덕분에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을 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 몸이 피곤할 때는 새벽에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지옥가자고 재촉하는 저승사자 소리만큼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아주머니는 새벽잠이 없고 초저녁잠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저녁 8시 반이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에는 여지없이 눈을 뜨니 새벽기도는 자동적인 코스가 된 것입니다. 파김치가 된 날에도 나는 도살장 끌려가듯 아주머니와 함께 새벽기도형 인간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많이도 울었습니다. 나름대로 '쌓인 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 좀 도와주이소 나도 남들처럼 대학원도 가고 유학도 가고 공부도 더 하고 싶어요. 하나님, 우리 엄마가 저 부산 영도 촌구석에서 저래 혼자 고생하고 계시는데 나 빨리 성공하게 해주세요."


 나를 서울로 유학 보내면서 졸업식 때 오신다고 약속하신 아버지는 내가 대학교 2학년을 채 마치기 전에 과로로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전부터 몸이 편찮으셨던 것을, 가족들이 걱정하고 병원비가 많이 들까봐 숨겨 오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입니다. 의지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습니다.

 "하나님, 그라니까 지 쪼매만 도와주이소! 예?"

 새벽마다 나는 한결 같은 내용으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약자 편이신데, 나를 좀 도와주셔야지! 내가 어렸을 때, 주님 처음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너랑 함께 한다, 니 인생 내가 책임진다' 그랬으면 좀 밀어주는 분위기가 있어야 안 하겠습니까? 예수 믿은 지 10년도 훨씬 넘었는데 도대체 나를 신경 써주는 기미가 안 보이잖아요? 하나님, 나 좀 도와주시소. 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지 아버지가 목사님이고 장로님인 내 친구들은, 그 아버지들이 밀어주고 당겨주고 기도해주고 오만 거 다해 줄 거 아입니까? 나는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밀어줄 아버지가 안 계십니다.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진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새벽마다 못되게 아버지 친구들까지 걸고넘어지면서 기도했습니다. 내 형편이 나 스스로 너무 안타깝고 답답했기 때문에 하소연하는 탄식의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새벽기도회에서 목사님 설교가 끝나고 기도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내 마음에 이런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민아, 니는 맨날 기도할 때마다 불만이 와 그래 많노! 그라고 맨날 달라는 것이 또 우예 그래 많노! 그라지 말고 그전에 니가 가지고 있는 거를 먼저 하나님 앞에 한번 드려봐라. 그러면 이 하나님이 밀어주든지 댕겨주든지 화끈하게 한 번 할 거 아이가!"


 나는 부산이 고향이라 기도를 부산 사투리로 했는데, 하나님도 내게 부산 사투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내 속에서 울려진 음성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하나님이 가진 것을 먼저 내놓으라는 음성을 듣고 확 열이 뻗쳐올랐습니다.


 "하나님! 내 가난한 거 모르십니까? 나한테 뭐가 있다고 내놓으라 하십니까!"


 그 뒤로 은혜가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감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두 번 울면 적어도 한 번은 울었던 나였습니다. 그런데 예배의 감동도 없고 기도도 안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몇 달 지속되니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 가난한 거 하나님 모르세요?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데 도대체 하나님이 왜 이러십니까? 내 놓긴 뭘 내놓으란 말입니까?"


 그래도 여전히 내놓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 두 가지 결론을 냈습니다.

첫째는 내가 성악을 전공하고 있고, 젊음과 함께 남다른 열심과 부지런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나는 뭐든지 하나 맡기만 하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나는 인기가 많았습니다. 특히 키가 작다보니 젊은 여자들보다 할머니들이 무척 귀여워해주셨습니다.

 '교회 어르신들 가운데 노환으로 집이나 병원에 누워 계시느라 주일에도 교회를 못나오는 분들이 계시다. 그래 좋다. 지금부터 그런 분들을 찾아가 몸으로 때우는 거다. 내가 남들보다 노래를 좀 잘하고 어르신들도 나를 좋아하니까, 이제부터 어르신들을 찾아가서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기도해드리고, 찬송도 불러드리면서 그분들의 기쁨조 노릇을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이상하게 그동안 불편했던 마음이 씻은 듯이 편안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먼저 내놓으라고 하신 그 무엇이 바로 노래하는 일이며 찬양의 봉사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악의 길을 걸어서 결국 나는 스물다섯 살에 부산 고신대학교에 전임대우 교수로 초빙을 받았습니다. 주일에는 서울에 있는 경향교회를 섬기고 평일에는 부산에 고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고신대학교에 간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고신대학교를 섬기면서 수많은 교회에 가서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1년에 150번에서 200번 가까이 곳곳에서 집회를 열어달라고 해서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이상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에 방문교수로 미국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재충전을 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미국에 갔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미국의 40여 개 주 120곳이 훨씬 넘는 곳에서 우리를 초청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 앞에서 음악회도 열고 복음도 전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 교도소 학교 지방교회 수 곳에서 나를 초청하게 되었고  제아내와 함께 노래를 했습니다. 암 환자들에게 노래를 불려드리면 예수님을 영접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들은 나환자 들이였습니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강원도에서부터 소록도까지 조그마한 나환자촌에 돌면서 살이 썩는 냄새가 곳곳에 일어 났지만 찬양을 통해 가는곳 마다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가는 곳 마다 눈물 없이 집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3. 나가는 글

경주 문화고등학교에서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 땅에 청소년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한지 체험했던 집회였습니다.  여러분! 자녀들과 이 땅에 청소년을 위해 꿈과 비젼을 주세요. 그리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내어 놓아 역사를 이룬 것 처럼 여러분의 은사를 내어 놓기를 바랍니다.  우리주님을 배반한 베드로에게 찾아가서 네 양을 쳐라 했던 것처럼 주님의 귀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귀한 부모님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강사 소개 : 참 기쁨과 감사를 부르고 '행복의 절대음감'을 들려주는 믿음의 테너. '모든 것을 태우는 불 같은 이야기와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물 같은 노래'가 한 몸에 있어서, 그가 간증하고 말씀을 전하는 현장마다 웃음과 눈물, 감동과 도전이 축제의 파도처럼 한꺼번에 휘몰아친다.

이북 출신으로 부산 영도에 정착한 부모 슬하에 1남 3녀 중 외동아들로 태어났고, 가난했지만 천부적인 노래의 꿈을 어찌할 수 없어 성악을 전공했다. 대학 2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앞날이 하도 막막해 "도와 달라"고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가진 것부터 내놓아보라"고 하셨다. 작은 것이라고 생각한 그의 목소리를 내놓았을 때, 그 뒤부터 그의 인생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만 펼쳐져왔다.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생 시절에 동아 음악 콩쿠르 성악부문에서 입상했고, 다수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다. 25세에 고신대학교의 전임 대우로 일찌감치 교수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태리 롯시니 국립음악원(Diploma)과 로마 아르츠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2001년 미국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컬리지(Westminster Choir College)에서 방문교수로서 현대 교회음악을 연구했고 지금은 고신대학교 예술대학 교회음악과 교수 및 부총장(교학부)을 겸하고 있다.

부산 사직동교회의 장로이자 찬양사이며, 고신대학교 합창단 '페로스'의 상임지휘자로서 직접 노래하고 지휘하는 일을 쉬지 않고 있다. 부산장애인전도협회 이사장, KOSTA(해외한국학생수양회) 강사로도 섬기고 있으며 국내외 교회 및 학교에서 연간 200여 회에 달하는 집회를 인도해왔다. 첫눈에 반해 6년을 연애하고 25년 넘도록 함께 노래하며 살아온 오늘까지, 퇴근길에 다시 만날 생각만 하면 여전히 가슴 설렌다는 아내 정진희(메조소프라노) 사이에 성은과 성준 두 아들을 두었고, 아이들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를 모두 모시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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