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못을 지나며-
손 숙 희
봄 향기가 가득하다. 가지마다 새 잎이 돋아나오는가 하면, 꽃망울 맺힌 꽃나무도 줄을 이었다. 생명의 부활, 그 풍경이 참으로 정직하다. 계절과 자연의 질서에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다. 어쩌다 보면 2월은 바람 같이 지나가고, 또 삼월은 일에 잠겨서 눈을 뜨고도 못 보던 봄 풍경이 아니던가. 이때쯤이면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이유나 유혹이 물안개처럼 피어나곤 했었다.
교회가 수성구 지산동으로 이사를 하고부터는 집과의 거리가 많이 멀어졌다. 성서에서 지산동 드림교회까지 오려면 시내의 수많은 교회를 지나게 된다. 유능한 목사님을 모신 교회들이 차창으로 줄지어 다가오고 지나간다. 예배를 드리러 그 멀리까지 가야 하느냐는 물음에 답은 명쾌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떤 힘에 이끌려 주일마다 이 길을 오고 있다.
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이 길을 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황금동 산을 지나면서 그런 갈등을 날려버리곤 했었다. 아카시아 숲이 빽빽하게 둘러 있는 산 아래의 학교 건물에는 대구과학고 표지판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산바람에 꽃냄새와 나무 향기가 차창으로 밀려들면 학교 앞이었다.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 아들에게 세탁한 옷가지와 간식을 갖다 주려고 매주 한두 번 찾아온 길이다. 집 떠난 아이를 만나는 마음으로 단 한 번도 멀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편할 리 없는 학교생활이 즐거운 듯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오히려 복잡하고 먼 길을 오가는 어미를 걱정하던 아이였다. 아들이 학교를 떠난 후에도 그곳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아렸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일요일이면 시가지를 가로질러 이 길로 교회를 왕복했다. 학교가 나타나면 건물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손 흔들며 배웅하던 모습의 잔영이 남아서일 게다. 그 기억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집착이었을까. 그 후로 아이는 줄곧 집을 떠나서 생활하였고 방학이 되면 며칠씩 다녀가는 손님 같은 가족이 되고 말았다.
요즈음은 도심의 도로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작년부터는 신천대로를 달린다. 전보다 차량이 늘어나 시내를 통과하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리기도 하려니와 가끔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길에서 가슴 졸이거나 낭패를 당하는 일이 있어서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상쾌한 공기를 뚫고 신천대로를 달리면 도시가 내 품에 들어온다. 라디오 채널을 고르면 좋은 음악이 있고, 귀한 말씀이 있으며, 새로운 정보도 있다. 선택에 따라서 길의 풍경이 달라지듯이 삶의 그림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음이 재미있다. 신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맘껏 허용한 셈이다. 세상은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고 또 나쁜 일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활철학을 몸으로 터득하는 시간이다.
정목사님의 설교는 먼 길 달려올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우선 순서가 된다. 「누가복음」이나 「로마서」를 다분히 신학적 견해로 풀어주시는 것은 물론, 때로는 문학과 철학의 진수를 뽑아 기독교의 정신에 투입하시는 데 전율을 느낀다.
헤밍웨이의 작품 속에 인용된 성경의 구절을 증거하시고, 엘리어트의 ‘황무지’ 속에 투영된 잔인한 사월의 의미를 들려주신다. 톨스토이가 믿었던 하나님과 만나게 하고, 도스토옙스키의 신을 전해준다. 위대한 과학자가 신의 솜씨라고 외경을 금치 못하는 신비한 우주를 통해 존재를 일깨워 깨달음을 주신다. 램브란트의 명화 속에 깃든 탕자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오프라 윈프리가 믿는 하나님을 증거해 주신다. 그래서 나는 매주 먼 거리를 달려 예배에 참여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길은 여러 갈래로 나 있지만 마지막 코스는 수성못가로 이어지는 좁은 도로이다. 시간이 이르다 싶으면 수성못에 들어서서 물과 숲을 즐긴다.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오는 길은 멀지만 그 시간만큼 계절을 가까이 머물게 함으로써 느끼고 감사할 일들은 많아진다. 아이의 학창 시절에 내 마음이 그랬듯이 지금도 나에게는 정녕 축복된 길이다.
오늘도 30분 이른 시간을 위해 못 가의 벤치에 앉았다. 꽃봉오리 벙그는 봄 풍경 속에서 또 하나의 풍경이 되어 있는 나를 들여다본다.
(2010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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