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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1-13 18:25
[국내선교] 2011학년도 기독교사수련회(성광중고편)
 글쓴이 : 강창술
조회 : 2,416  
   2011 기독교사 수련회.hwp (44.0K) [0] DATE : 2011-01-13 18:25:58

2011년 기독교사 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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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1. 1. 3(월) 저녁 8:00-18:00

장소 : 성광중․고등학교(내) 성광교회

강사 : 최재호목사(대구성일교회담임목사)

성경말씀 : 창세기 8장 : 20-22절

20절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작년에 교직원 예배에 참석한 후 올해 2번째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자연인입니까 은혜인입니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주로이야기 할 때 우리는 신약에 나오는 사복음에서 찾는데 저는 구약에서 창세기 1장-11장 사이를 복음서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창세기는 11장까지 모든 만물이 홍수로 다 죽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21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본문 21절처럼 사람이 계획하는 것이 모두 악한데 죄로 말미암아 인간과 환경이 오염이 되어 환경이 파괴 되었습니다. 노아 때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시작하여 심판하셨고 그 이후로는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다시는 멸하지 아니하며 보존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1절 하나님께서 창조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타락이후 하나님께서 창조질서를 보존 한다고 하십니다.

신학에서는 일반은총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삶속에서 성도로서 생활과 일상생활속에서 갈등을 많이 합니다. 교회서는 성도지만 직장에 가면 성도로서 생활하기보다는 직장인으로서 갈등을 많이 합니다. 물론 성광처럼 기독교학교는 갈등을 잘 못 느끼지만 제가 교회서 상담을 해보면 특히 건설업, 일반직장 사람들은 엄청 갈등이 심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적당하게 타협합니다. 기독교인은 늘 갈등합니다. 교회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살다가 직장에 오면 세상인 으로서 사는 것 입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열정도 없고 고민도 없습니다. 이러한 부문에 신학에서는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신학적으로 우리를 자연(Nature)과 은혜(Grace)에서 구분합니다. 현재 상태에서 두가지 비전을 제시합니다.

타락이전의 정상적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는 시대 즉 자연(Nature)만이 충분하고 비정상적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하는 시대 즉 은혜(Grace)가 필요합니다.

자연인으로 사는 것은 휴머니즘을 기초로 합니다. 인간의 계몽주의로서 교육을 시키고 연구하고 유토피아를 꿈꾸며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치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비정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 입니다.(자연(Nature)) 불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혼자서는 할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사람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하는 이유도 우리가 비정상인이기 때문에 불안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8장에 노아의 홍수사건이 나옵니다. 인간의 타락이후 처음으로 하나님의 개입이 나옵니다. 창조질서의 본론은 1) 창조- 자연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 없고 2)창조타락이후 하나님의 개입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을 합니다. 인간이 비정상적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의 간섭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간섭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현재 인간의 상태를 중세천년을 좌지우지한 로마 가톨릭입니다. 1차적으로 인간이 자연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봅니다. 첫 번째 아담으로만 충분하다고 합니다. 즉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보충적이라고 봅니다. 즉 중세 가톨릭은 자연(Nature): 공교육이라고 말하면 은혜(Grace): 사교육이라고 말합니다.

선생님들도 자기 자녀는 사교육을 의지 하더군요 하하...

 

은혜는 자연인에 보충적입니다. 중세 카톨릭에서는 이원론주의를 말하는데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합니다.

카톨릭에서는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을 합해서 다원주의로 모두 거룩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직업관에서는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거룩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직업은 성직과 세속적인 것으로 구분을 하지 않지만 카톨릭에서는 직업관에서는 성직과 세속적인 일로 구분합니다.

종교적인 면에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직업은 소명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종교개혁에서는 삶은 지체안에서 각자 기름 부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 지난여름은 너무 더웠습니다. 청소부에서 파업을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힘들었고 그 직업에 대한 소중함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의 기능적인 면에서 그 역할을 하며 살아갈 때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하며 하나님의 소명임을 알게 됩니다.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신학적인 관점에서나 1000년 중세를 이끌었던 로마 카톨릭에서도 성경과 세속적인 것에 구분하며 우리 삶속에서 아직까지 존재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유교가 우리 속에 잠재해 있어서 직업 : 농업, 공업, 상업 순으로 생각했지만 언젠가 우리의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히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상업-공업-농업 순이 되어 버렸습니다. 은혜가 카톨릭에서 말하는 자연에서 보충으로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며 종교개혁이후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회복되어 자연과 은혜가 조화를 이루며 우리의 일상속에서 생활에서 나타나며 개입되며 은헤가 많이 필요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창조자론자들은 창조는 하나님의 계시 이고 시작이고 기초입니다. 인간 타락이후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담에게 그대로 필요했습니다. 죽어야 마땅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탄과 원수가 되고 계시의 성격이 타락이전에는 사명의 집합이며 이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은혜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선택자와 이방인

창세기 12장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게 되는데 여기서 두 줄기로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1) 하나님의 선택자와 2) 이방인 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령의 역사는 우주전방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그 방법은 특별한 방법을 거듭하여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일반은총은 죄가 들어와서 자연을 파괴되고 그 자연이 더 이상 파괴되지 않도록 억제하며 보존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전으로 역할을 하는데 일반은총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것 이고 은혜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거듭나고 변화되어 구원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양심은 국가와 사회질서 시스템을 막아주는 하나님의 일반은총 범주에 누릴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나타 날 때 정장을 입고 학생과 사람들 앞에 섭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를 억제하고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보존하기위해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필요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로 누구에게나 함께 역사 하시는 것 입니다. 성령은 우주적으로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과 은총

자연종교는 은총이 없습니다.

계시종교는 은총이 필요합니다. 차이는?

자연은 자기의 이성과 철학으로 하나님을 찾는 종교이고 즉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 이고 계시종교는 하나님이 항상 인간을 찾아오시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이 항상 불순종해도 하나님이 항상 찾아오는 사건을 우리는 성경에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아담이 첫 번째 라면 예수그리스도는 두 번째 아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12장에서 예수안에서 모든 족속이 복음을 받게 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바울사도는 이방인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접붙임으로 그 사람이 이제 새 생명을 얻고 예수 안에 사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시의 보존자로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안에서 모두 확정을 받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기민족만이 구원받는다는 선민사상은 특별한 적임자이지 그들만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모든 은혜가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 것 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복음이 입증될 때 자연주적으로 초대교인에게 인간의 구원의 개념을 두 가지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먼저 지상적이고 자연주의적인 감각적이고 순수한 인간창조(자연적이고) 2) 그 후에 자연인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덧붙여진 은혜였는데 범죄사건이후 즉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사라진 즉 하나님의 은혜도 사라짐 초월적인 은혜가 원죄로 말미암아 사라진 것처럼 덧붙여진 은혜가 사라지고 원래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원래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것 입니다. 로마교회안에서 1) 이성적이고 자연적인사람 2) 초자연인이 상실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품이 달라지고 그리스도안에서 삶을 갖는 특별한 영적은혜가 접해져 초자연적인 은사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좀더 신비적이고 상태를 갖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인간의 타락이후에 은혜는 자연적으로 돌아가는데 보충적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1) 죄로 인하여 약화 된 자연의 힘 2) 인간의 초자연적인 은사를(보존과 성취) 지상교회가 유일한 대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상교회에게 자기의 영권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상교회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 교회권위는 너무 강하여 로마 카톨릭에서는 왕과 교황을 견주어 나가는 시대를 맞기도 했습니다.

1) 초자연적인 제도 : 순수함, 너무나 인간적인, 이성적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행함 원리를 강조 선행을 앞세워 하나님의 주권에 도달 할 수가 있다는 것 이고 2) 자연적이지 못하다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인간관으로 자연적인 생활이 해롭고 헌신적이며 자연적인 생활에 어려움이 있으며 인간의 고뇌를 통해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 터키에 가면 바위산등에서 자기몸을 학대하며 초자연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말하는 신비적이고 거룩한 모습은 자기를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고 자연적이고 완전한 것이 성직 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기능적인 구분입니다. 지금은 여성신학, 여성운동, 아내의 역할은 역할이 다른데 중세 카톨릭에서 말하는 경건과 훈련을 통해 성직자를 엄격하게 세워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두 부류를 나누는데 자연적인 것을 강조하고 또 다른 면은 영성을 강조(순복음)하는 은사운동 이 모든 것이 카톨릭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자연을 강조하는 사람은 초자연적 존재인 거룩과 세속을 구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은 거룩이고 신비적이고 고상적인 반면에 그렇지 않는 것은 모두 죄로 여기는 이중구조를 표현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두 구조를 묶어서 선행을 한다고 해서 죄 사함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 사함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보충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종교개혁은 은혜언약이 될 원인이며 자연적이고 신비를 합친 것을 말합니다. Nature + Grace 자연과 초자연적인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만이 구원이 됩니다.

타락한 인간 속에서 루터는 조화를 강조한 반면에 캘빈은 타락한 인간은 자연적인 것인데 선이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의 존재는(종교다원주의전략 위험성)바울시대에 와서 강조가 되고 있다. 자연적인 것을 강조안하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에서만이 구원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성경에서의 기준은 성령의 사역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일반은총이 있으며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어지는 피조물이 더 이상 파괴되지 않고 보존하는 역사 입니다. 창조에서 나타나는 것은 은혜언약아래서 성령의 역사는 죄인을 회복시켜 변화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죄인 된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켜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 입니다. 일반적인 은총은 더 이상 확대 되지 않도록 보존하는 원리입니다.

예) 사단이 욥에게 접근합니다. 제물에 손을 대지만 하나님께서 몸에는 손대지 말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사단은 몸에는 손을 대지만 목숨에는 손대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경계를 설정합니다. 사단이 아무리 설쳐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질서에 경계를 설정하고 자기영역 안에서 행하여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이원론적인 것은 자연(Nature)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으로 가는 것 이지만 은혜(Grace)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차원입니다. 요즘에 재 세력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바로 자연을 강조하고 현재를 무시하고 오로지 자연적인 것 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세력을 의미합니다. 미국에 가면 1960년도부터 이민 온 세력이 있는데 자연으로 돌아가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검은 옷에 검은 모자에 문화 및 과학을 이용하지 않고 아직 소를 통해 농사를 짓고 전기도 이용하지 않는 원래 인간본 모습에서 출발합니다. 나이가 18세 되면 결정권을 주는데 아직도 이러한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래야 만이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사단의 음해로 교회는 텅텅 비어있고 캠퍼스에서도 이단세력이 들어와서 성령을 무시하고 사단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세력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속화 자연을 초토화 시킵니다. 초자연적인 것은 한 교회서 많은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만이 우리를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균형 잡힌 신앙생활 말씀과 성령이 항상 함께 가야합니다. 말씀이 증거 되지 않는 곳에 거듭남이 없습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만이 역사가 이루워 집니다.

바울사도가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꼭 목사로 선교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 위치에서 충성을 할때 바로 그분이 사역자이고 헌신자입니다. 여러분의 현재위치 바로 성광학원 교사로서 선교사임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여러분이 사역자이고 선교사이며 사명자입니다. 어떠한자세가 필요합니까. 여러분의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오형적이거나 공간의 의미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사도가 고전 7장 18절 말씀처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역자로서 헌신하시면 됩니다.

 

거라신- 군대귀신(누가복음 8:26-39)

26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27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 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 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 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우리는 거라신 군대귀신 들린자처럼 모두 사역자(목회자,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38-39절처럼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바로 여기서 복음사역자로 남아 있기를 주님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교사로서 사역자임을 알고 모든영광을 하나님께 그 푯대를 잊지 않고 사역자로 남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글 정리 : 강창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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