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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22 16:18
고) 이춘우장로님을 생각하며(오보평강교회설립자)
 글쓴이 : 강창술
조회 : 282  

) 이춘우장로님을 생각하며(오보평강교회설립자) 

드림교회 강창술장로 

이춘우장로님을 처음 뵈올때에는 1968년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두 청년이 조카와 어머니를 모시고 매정에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처음거주한곳 은 임정근형님집 (매정의 대표적인 임씨 집안, 경원대 음악과교수, 전 대봉교회지휘자, 전 대구할렐루야지휘자)이었습니다. 우리 집 한집건너 집이었습니다. 집을 사서들어 왔는지 빈집이라 들어 왔는지 잘 모르지만 청년들이 왔습니다. 동생은 이말출형님 이었습니다. 1968년 초등학교 1년인 저는 어릴 때 부터 교회 뒹굴고 살았습니다. 그때 교회를 나오셨고, 청년은 성경이야기를 너무나 잘하셨습니다. 안동신학교를 나오셔서 교역자를 모시기 어려운 시절에 두 형제는 교회에 큰 기둥이었습니다. 어릴 때 다니엘이야기에 매료당하여 줄 곧 따라다니며 남들이 볼 때 형제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에 마치면 춘우형님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놀곤 하였습니다. 우리 어머니왈 오보에서 올라온 청년집에 우리이가 산다.” 

고향 매정은 교회를 단니 던 안 단니 던 교회행사에는 모두 동참하는 교회문화가 조성되어 마을 40호가 모두 교인이고 모두 한 형제처럼 형성되었습니다. 그런 동네 들어와 춘우형님은 쉽게 마을에 안착을 했고, 처음에는 닭을 기르고 학교 옆 전답을 부치다가 나중에는 밥을 사서 그곳에 특수농사를 지었습니다. 토마토, 수박, 참외, 도라지, 고추, 사과, , 봉숭아나무를 조성하여 매정에서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특수농장을 1968년도에 시작하였습니다. 어릴 때 저의 눈에는 모든 생활은 교회중심이었고, 교역자 중심이었습니다. 정직하게 모든 것을 하였고, 산의 나무나 곡식, 농사모든 것은 교역자 중심, 교회중신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지만 그것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1969년 학교옆 밭으로 집을 옮깁니다. 집은 흙벽돌로지을 때 저는 매일 출근하듯이 그 집을 짓는데 참여 하였고, 1년만에 멋지게 집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날 까지 그 집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이춘우장로님 부인(형수님, 오보평강교회 권사)이 자녀들과 함께 살면서 집은 매정인데 오보까지 교회를 단니고 있습니다. 그때 1970년 김외관전도사님이 오셔서 교회개축(5번째)을 하게 되었습니다. 1년 이상을 교회를 춘우형님과 말출이 형님 그리고 저와 함께 교회를 개축에 들어갔습니다. 신애아버지도 많이 했고요 정말 온 마음을 다해 교회를 섬기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택과 함께 멋지게 오늘날까지 그 건물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교역자님들을 섬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첫 수확은 반드시 교역자에게, 하루는 노루를 잡으러 청년들과 함께 갔는데 잡았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떼어내어 교역자에게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역자를 섬기는 것을 삶을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1971년 영덕 창수리에 있는 원항교회에서 김영김씨 한 처녀를 아내로 맞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아내를 잘 설득시켜 교회 섬김은 변함 없었습니다. 슬하에 12남을 두었습니다. 청년들의 모임 장소가 춘우형님 집이었습니다. 언제든지 가도 촌에서 구하기 쉬운 먹는 것은 고구마, 감자, 과일을 내어 놓고 청년들이 갈 때 올 때 없으면 모이는 곳 이 춘우형님집 이었습니다. 교회가 풍성해졌습니다. 청년들이 활성화 되고 주일학교도 부흥하였습니다. 영덕 시찰회에서 매정 촌구석이었지만 참여 할 정도로 학생회도 부흥했습니다.(제가 중1,2학년 시절 서기, 부회장 맡아서 섬김) 또한 도시교회가 수련회장소, 도시교회 어른들이 올 때 모든 것을 춘우형님이 다 접대했습니다. 교회손님은 춘우형님집이 도맡았습니다. 도시교회가 우리를 돕게다 해서 무조건 받으면 되나 우리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지 늘 그런 정신으로 농촌교회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고 농촌교회를 지켰습니다 

교회가 완성이 되고 교회 일꾼자를 세우는데 형님은 1975년 장로로 피택되어 시무장로로 교회건축 봉헌과 동시에 장로로 임직했습니다. 여기서 원로장로님과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때 이사 온 임씨 집안 사위 한분이 김형조집사님이신데 장로로 세우고 싶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때 함께 세워졌고 그 분들과 의견이 충돌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같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대구로 이사로 갔었습니다. 이때 시무하시는 전도사님도 춘우장로님과 친하다는 이유로 포항 내연산 근처 송라교회로 가시고 후임으로 오신분이 유영복전도사님이십니다. 이 분은 기도를 많이 하시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많이 주장 하셔서 중고등학교 시절 부흥회를 하면 방언을 해야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하는데 장로님과 저만 못하는 웃지 못할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전도사님은 믿음이 약해서 그런다 해서 둘이 산 기도를 가서 밤새도록 기도한 그런 추억이 있습니다. 그때 장로님께서는 교역자라면 자다가도 깨어 날정도로 충성을 다 하시는 분 입니다. 그분이 인도 하는데로 산에 기도원(비닐로 천막)을 세워 기도도 하고, 이상한데 빠졌다고 이것을 빌미로 잡아 결국에는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분을 아는 것은 10년 정도(초등학교~중학교 2년 부산 전학 갈 때 까지 함께 딩굴고 살았고) 그 이후 중고등학교, 대학시절 방학에는 항상 내려와 나눔과 기도, 그리고 섬김에 대해 멘토 처럼 해주셨습니다. 장로님과 에피소드는 책을 한권을 만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남는 것은 1) 교회건축 매정교회, 대탄교회, 석동교회를 지을 때 따라 다니며 디모도 역할이 가장 기억이 많습니다. 흙벽돌을 만들어 세우고 터를 잡고 함께 리어커를 몰고 매정으로 돌아올 때 함께 휘파람불며 올때가 너무 좋았습니다. 어릴 때 는 몰랐는데 그것이 바로 선교고 복음이었습니다. 2) 교회가 땔깜이 없어 전 교인들이 1년간 땔 나무하려 산에 갑니다. 고구마를 삼아 리어커, 경운기를 몰고 삼박골에 가서 우리는 1년 치 나무를 합니다. 하면서 함께 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3) 장로님하고 과수원을 만들어 수확된 수박, 참외, 토마토를 리어커에 실고 오보, 노물, 매정 2,3, 석리까지 장사하던 시절이 어릴 때 추억으로 다가 옵니다. 과일을 심을 때 모종을 만들 때 어렸지만 지금보면 우수한 경영법을 도입한 것 같습니다. 4) 매정교회부흥회 할 때 오보, 노물, 석리까지 매정교회 집회를 마치면 밤에 아이들 바래주려고 공동묘지도 거쳐야 하고 이상한 소문이 있는 지역도 통과 해야하고 예수이름으로 외치며 아이들 바래주고 돌아오는 추억이 일어납니다. 5) 도시사람들이 농촌교회 돕기 위해 청년들이 와서 활동(지금 보니 아웃리치)을 보면서 서울 동도교회 청년들이 내려와 마을을 청소하고 돕고, 우리학생들에게 기도와 성경소그룹이 저에게는 매우 인상적이고 그때 섬겼던 사람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수많은 추억을 남기고 그분은 오보로 내려갔습니다. 집은 매정에 있고 예배와 교회 섬김은 오보였습니다. 나의 행동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오보를 갈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신앙지는 매정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행동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저는 매정교회 남아 있었습니다. 남아 있으니 바라 창술이도 매정교회 남아 있는데 저 장로님의 신앙이 잘못된 것 아니냐 하며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따라 가지 아니했지만 매정에서 장로님과 나눔은 계속되었고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정도 더 들고요 그러다가 저는 대학으로 대구에 오게 되었고 차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상한 소문이 막 들립니다. 오보교회서 나와서 평강교회를 새로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농촌교회는 도시교회 지원이 많았는데 통장을 교역자가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꾸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소문, 장로님이 도시교회지원을 안 받는 것이 하나님앞에 정직하다고 해서 이상한 소문이 막 돕니다. 그러시다가 20년전(2000년도) 하늘나라에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저는 매정교회 100년사를 주필을 하면서 매정교회에서 한 역사를 설 때 에는 이춘우장로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매정의 어른들은 그분을 잊기를 원하고 지우기를 원했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7개 부락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삶, 재산, 누리는 것 까지 모두 하나님을 위해 전적으로 맡긴 인생이었습니다. 대탄교회 석동교회를 지을 때 도 그는 교회 짓는 것이 삶이었습니다. 오보교회를 지을 때 에도 오보가 바닷가라 미신이 강한 곳 입니다. 물론 그곳에도 기득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요 특히 정권찰”(추경호장로님이 잘 아시는분)이라는 분하고 많이 힘들었는 줄 압니다. 그분은 강했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터를 잡기에 갈등이 많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저에게 가끔 비추기는 하셨습니다. 그래서 평강교회를 설립 안 했는가 오로지 제 생각입니다 

장로님의 삶을 돌아보면 오로지 교회, 교역자 중심이 그분의 삶이 전부였습니다. 그분은 섬김을 통해 복을 많이 받았었고, 후손들도 부흥한 것을 봅니다. 지역사회를 위해 섬김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비록 교회 단니는 사람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지역주민들에게 신앙인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정신 약한자를 돌아보고, 공동체의 삶을 우선이 여기는 몸서 실천 하셔서 많은 분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을 깨닫게 해주신 귀한 분 이었습니다. 자기일보다 먼저 남을 배려 하는 귀한 마음, 남의 어려움이 있으면 한번도 어려움을 내색치 않고 몸서 자기 일처럼 해주신 귀한분임을 지역분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잘 지어 놓고 쫒겨 나가듯이 매정교회를 미련 없이 권리를 포기하신 분, 이 부분에 대하여 지역민이 안타까워하며 장로님의 포기선언에 눈물도 보인분들도 있었습니다. 매정동을 위해서라도 오보에 가면 안 되는데 워낙 이쪽편이 강하니 하며 혀를 찼던 모습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역주민들이 걱정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어두운면을 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지역주민들은 다 아는데 교회 다니는분 들도 다 아는데 오로지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부만 모르는 안타까운 면을 저는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습니다. 농촌교회 교역자님들의 삶은 너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섬겨온 귀한 장로님 저는 마음속에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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