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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8-07 19:39
[국내선교] 2017 아웃리치 기도정보 1호
 글쓴이 : 강창술
조회 : 1,606  
   아웃리치_기도정보_1호.hwp (32.0K) [0] DATE : 2017-08-07 19:39:47

2017 아웃리치 기도정보 1호

(2017.08.07)

 

[영덕아웃리치 주위정보]

▣ 매정리

매정리 이명(里名)의 유래는 매정(梅亭)의 매(梅)자와 양정(良亭)의 정(亭)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東面) 지역이었으며,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기곡동, 성황동, 신리동, 매령동, 양정동을 병합하여 매정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시켰다가 193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에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매정리는 영덕읍에 소속되었으며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매정동은 매정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行政洞)으로는 1,2,3리로 분동되어 있다. 매정리의 위치는 동은 노물리, 오보리, 서는 화수리, 남은 삼계리, 북은 석리가 있다.맷재(梅嶺) : 매정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15세기 중기인 세조(世祖) 연간에 순흥안씨가 개척했다고 함.

▣ 석리

석리 동명의 유래는 돌이 많은 곳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7세기경인 인조(仁祖) 연간 병자호란때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이곳에 피난하여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김해김씨(金海金氏)와 김녕김씨(金寧金氏)가 정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 이었으나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예진동 돌면동을 병합하여 석리라 하고 오보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영덕읍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12km 거리에 있는 해안 마을로 동은 동해, 서는 등달골산과 매정리가 있으며 남은 노물리, 북은 축산면 경정리가 있다.

▣ 노물리

노물리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노물(老勿)」이란 늙지 말라는 뜻으로써 늙지않는 즉 장수(長壽)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노물이란 이름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도 나오며, 물(勿)자는 고구려 계통의 언어로 아마 4~5세기 경 고구려가 남하하여 청하와 흥해를 경계로 할 때, 영덕의 지명인 야시홀이란 이름이 붙을 당시에 같이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13세기경에 안씨(安氏), 정씨(鄭氏), 박씨(朴氏) 등이 정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東面) 지역으로 노물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부,군,면(府郡面)을 폐합할 때 노내리(老內里)를 병합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되어 오다가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될 때 영덕읍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매정리, 남은 오보리, 북은 석리가 있다.

▣ 대탄리

대탄리 동명의 유래는 동해 바닷가 큰 여울 옆이 되므로 해여울, 해월, 또는 대탄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6세기경에 정영용(鄭英用)이란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이름을 향월(香月)이라 하였는데 19세기 중기에 강씨(姜氏)라는 분이 들어와 마을에 큰 여울이 있다 하여 대탄이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대탄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시켰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되어 오다가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대탄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탄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삼계리, 남은 창포리, 북은 오보리가 있다.

▣ 오보리

오보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가 까마귀(烏)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올치미"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전해 내려오면서 오보(烏保)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15세기경 유씨(劉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본래 오보부곡(烏保部曲)이 있던 곳으로써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으로 오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보동이라 하여 오보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들을 사이에 두고 매정리와 연해 있고 남은 대탄리, 북은 노물리가 있다.

 

[기독교 복음 전파]

1) 매정교회의 유래는 화천의 김용규와 매정의 임원준이 맷째(매정3리)박씨 가문과 결혼하여 김용규가 임원준을 전도하고 매정을 오가며 임인식, 노계식, 강우근, 오재술, 임영식, 임경도를 전도하여 안동지역 선교사 권찬영목사(크로더스 미북장로회 선교사)의 지도로 노계식의 집을 집회장소로 정하고 첫 예배를 드리니 이날이 2010년 3월 10일 창립한 교회입니다. 매정교회담임목사로 전국적인 인사 1) 차재명목사(새문안교회담임목사 총회장(1929) 2) 김세영목사(총회장출신, 평양신학교졸업), 3)노계식장로, 4)노현식목사, 5)강우근목사(평양신학교, 영덕읍교회담임), 박맹술목사(대봉교회담임목사, 총회장)

 

2) 대탄갈릴리교회 매정교회 이춘우장로님께서 제가 어릴 때 1970년도(예상) 이춘우장로님과 대탄서쪽지역에 흙벽돌을 만들어 교회를 건축함.

 

3) 오보교회는 매정교회에서 분립하여 1977년 5월 오보교회가 설립하게 됩니다. 합동측교단인 영덕에는 영덕교회가 있었고 영덕시찰에서 대구 중노회에 농어촌 지원 요청하여 당시 중 노회에 중심에 있던 우리교회는(담임목사 이종호목사님 , 추경호장로님) 그 제안을 받아 오보교회 개척(1977년 7월 10일)을 하게 됩니다. 건축비 30만원, 교역자생활비 5만원지원, 이종운전도사님, 개척당시 성인23명, 학생70명출발)

 

4) 석동교회는 1974년도(예상) 매정교회 이춘우장로님께서 석동 천지산쪽으로 교회를 설립함 당시 건축을 잘 하였던 장로님은 나를 데리고 석동교회를 지을 때 데리고 단니면서 교회설립에 많이 노력한 모습

 

5) 오보평강교회 오보교회에서 이춘우장로께서 분리되어 오보동에 교회가 설립됨

 

매정초등학교는 (이번 사역지로 사용하고 있는 장소)는 믿음의 선배들이 기독교학문을 통해 국가를 살려보는 영덕 최초의 사립학교립니다. 1910년 매정교회가 후진 양성을 위하여 영신학교(매정초등학교전신)를 세웁니다. 대구교남학교 동창인 매정교회 임경도장로와 영덕읍교회 주경호장로님이 협력하여 학교에 관심과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 그리고 애국운동을 전개함으로 민족자존심을 회복하였고, 일본의 방해로 1924년 폐교하다가 다시 개교하는 영덕지방 최초로 기독교 어늘들이 세운 학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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